돌 골라내기 (2) - 박약재에 새긴 뜻은?

사람에게 영적 리더십은 없다. (9)
옥석혼요(玉石混淆)에서 옥석구분(玉石俱焚))으로 (3)

3) 돌 골라내기 (2)

지난번 글에서 나는 한목사가 한자를 틀리게 썼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반백(斑白 - 半白) 그리고 성(成 - 城)이라는 한자가 잘못되었다고 지적을 하였지만 미안한 일이다. 그 이유는 첫번째, 요즈음에 한자를 모르는 것이 그리 흠이 될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어문정책이 오락가락했기에 입학을 언제 했느냐에 따라 한자세대와 한글세대로 나뉘니 한자를 틀리게 적었다고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니다. 둘째로는, 더구나 한목사는 미국에서 공부한 분이 아닌가. 또 하나 한목사가 원고에는 바른 한자를 적어주었는데 출판과정에서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만약 마지막 이유였다면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시기를 바란다.

다음의 경우도 출판사의 실수이기를 바란다.
(17) <대통령이 되는 것을 대권 (大勧)….> (시간의 마스터, 163)
(18) <성공하기 위해 유명한 사람들과 연(聯)을 맺으려고 …..> (시간, 252)

그런 실수가 있는데도 한홍목사는 한자를 자주 사용한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가 흔히 쓰지 않는 단어를 만들어 보이기도 한다. 대능(大能), 대심(大心)이라는 말이 그가 만들어 낸 단어이다.

(19) <사랑하는 이 땅의 리더들이여, 진정 대권(大權)을 추구하기 전에 대능(大能)을 구할 일이다.> ( 칼, 173)
(20) < 대권(大權)을 구하기 전에 대능(大能)을 구해야 하며, 대능을 구하기 전에 대심(大心)을 가져야 함을 알지 못했던 자의 비극이다.> (인생으로, 219)

대능이라 함은 능력을 많이 구하라, 큰 능력을 가지기를 소원하라는 뜻이리라. 하지만 대심이라는 단어는 우리 상식에 넓은 마음, 큰 마음인 줄로 아는데 앞의 문맥으로 보아 왜 이 말을 썼는지 알 수 없는 말이다. 어쨌든, 앞의 대권 혹은 대능이란 말과 운율을 맞추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대(大)자를 쓰면 더 좋게 보여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어색한 말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한목사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항상 큰 자리를 원하고 큰일을 하고 싶어하며 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대통령이 되는 것을 대권(大勧), 고등학교 다음엔 대학교(大學校), 나라 이름도 한국에 만족하지 못하고 대한민국 (大韓民國) 등 툭하면 대(大)자를 붙이는 것도 다 이런 욕구에서 비롯한다” (시간, 163)는 충고는 본인 스스로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이번에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한자를 잘못 쓴 것이 아니고 한자의 해석이다. 따라서 이 건은 위의 세가지 이유에서 모두 비껴난 일이니 나로서는 조금 덜 미안한 일이다. 솔직히 말해서 한문 해석이 틀렸다고 지적하기는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한목사의 잘못된 해석으로 해서 그 파장이 만만치 않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이 일에는 우리가 존경하는 퇴계 이황 선생까지 관련이 되어 있다. 이황선생은 전혀 모르는 일이고 관련이 없는데 그만 한목사의 잘못된 해석으로 그분의 생각까지 그릇되게 전달되고 있으니 후손으로서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그분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는 것도 후손으로서의 올바른 도리가 아닌가? 한자를 다르게 해석하는 바람에 이황선생만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역사 두 토막이 왜곡된 것이 있으니 그것도 바로잡을 일이다.

일단, 한홍목사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
(21) <안동의 퇴계 이황의 사가에 가보면 “박약(博約)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박사’ 할 때 쓰는 넓을 박(博)자와, ‘절약’ 할 때 쓰는 묶을 약(約)자, 즉 학문은 넓히고 예절은 줄이라는 뜻이다. 유교 500년 역사의 지나친 예법 강조로 인해 참된 인간성이 말살되고 메마른 권위주의와 이에 대한 하급층의 반발만 커져가는 것을 개탄하여, 이황선생은 껍질뿐인 예절은 버리고 참 인간을 만드는 학문을 깊게 하라는 준엄한 충고를 남긴 것이다.>(거인, 106-107)

한홍목사는 이황선생의 사가에 걸린 “박약재”라는 현판의 글씨를 해석하여 이황의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한홍목사로 하여금 이황선생의 사상을 풀어나가도록 한 이황선생의 사가에 걸린 현판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
먼저 사가(私家)라는 말을 살펴보자. 사가는 개인 집이라는 말이다. 개인이 살림집으로 쓰는 집을 사가라 한다.
이황선생의 사가는 어디일까? 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계동에 도산서원(陶山書院)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이 도산서원이 조선 중기의 대학자 퇴계 이황 선생이 머물며 후학들을 가르치던 곳인데 퇴계 선생은 1557년부터 이곳에 머물며 10년간 후학을 양성했다. 이황선생이 머무르며 사셨던 곳이니 그곳을 사가라 불러도 큰 문제는 없겠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사가는 아니다.

이황 선생 생존 당시, 도산서원에는 후학을 가르치던 도산서당과 자신의 공부방인 농운정사 밖에 없었으나, 선조 7년(1574년) 유림에서 퇴계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사당을 짓고, 전교당과 동재와 서재를 지었는데 바로 그 동재가 박약재이다. 혹시 수중에 천원권 지폐가 있다면 꺼내보시기 바란다. 천원권 지폐 앞면에는 이황 선생이, 그리고 뒷면에는 도산서당의 모습이 보인다. 뒷면에서 맨 앞에 크게 보이는 건물이 도산서당이고 그 뒤 나무에 가려 몸체는 보이지 않고 지붕만 보이는 건물을 지나 그 뒤로 건물 몸체부분 약간과 지붕이 보이는 건물이 바로 동재인 박약재이다. 그 위로 태극문양이 있는 대문이 보이는데 그것은 삼문이다. 그러니 지폐 뒷면의 그림중에서 가장 오른 쪽에 보이는 것이 삼문이고 오른쪽에서 두번째로 보이는 것이 바로 박약재이다.
따라서 그림 중 도산서당은 이황선생 생전에 있던 건물이지만 그 위로 보이는 건물 모두는 박약재를 포함하여 이황선생은 전혀 알지 못하는 건물들이다.

동재 곧 박약재가 사후에 지어졌으니 따라서 이황선생은 생전에 박약재라는 현판을 본 적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 이황선생이 현판에다가 뜻을 담아 준엄한 충고를 하였다는 것은 괴기영화에나 나옴직한 해석이다. 어느 여름날 제자들의 꿈속에 나타나신 이황선생이 “내 뜻은 박약(博約)이니 그것을 현판에 새겨라” 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이번에도 다시 백보를 양보하여 그의 제자들이 이황선생의 뜻을 알아 새겨서 ‘박약’이라고 현판에 새겼다고 하자.
그러면 박약이란 뜻이 한홍 목사가 해석한 내용과 같이 ‘학문은 넓히고 예절은 줄이라’는 것일까?

그럴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박약의 뜻은 한홍 목사의 해석대로가 아니다.
다시 한번 한목사의 글을 살펴보자.
< ‘박사’ 할 때 쓰는 넓을 박(博)자와, ‘절약’ 할 때 쓰는 묶을 약(約)자, 즉 학문은 넓히고 예절은 줄이라는 뜻이다.>

어떻게 박자와 약자 단 두자를 가지고 학문 그리고 예절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박약은 박문약례(博文約禮)의 준말이다. 그러니 박(博)자와 약(約)자 뒤에 각각 문(文)과 예(禮)를 넣어 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문(文)을 박(博)하게 하고 예(禮)를 약(約)해야 한다, 고 해석을 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한목사도 제대로 하고 있다.
한목사는 그래서 박학, 즉 학문을 박(넓게)하게 하라는 말을 “학문을 넓히고”라고 해석하여 맞게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다음 말 예(예절)를 約(묶다)하라는 말은 ‘묶다’라는 말 대신에 ‘줄이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니 눈 깜짝 할 사이에 ‘예로 묶어내라’는 말이 ‘예절은 줄이라’고 바꿔진 것이다. 한문장 안에서 앞의 말이 뒤에 가서 순식간에 바꿔진 것이다. 그러니 읽는 우리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눈감으면 코 베어가는 세상이다.

박문약례는 문은 넓게 하고 예를 묶으라는 뜻이다, 즉 '널리 공부하여 예의로 묶어내라'는 뜻이다.
그러니 한홍목사는 박자와 약자의 뜻을 알고 있어 약(約)자의 뜻은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주더니 정작 해석할 때에는 자의로 말을 바꿔버린 것이다.
좀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박문약례는 학문 연구와 도덕적 실천 방법을 말한 것으로 ‘넓게 배우고 예(禮)에 맞추어 행하라’는 뜻이다. 이말은 논어(論語)의 <"군자가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그것을 묶어 실천한다면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君子 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 )>라는 구절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기서 <박학어문(博學於文)>은 문헌을 통하여 널리 배우고 익힌다는 뜻이며, <약지이례(約之以禮)>는 이미 익힌 것을 다시 예로써 집약한다는 뜻이다.

결론하여, 이황선생은 그 현판과 전혀 관련이 없으며 또한 현판의 의미조차 한홍목사가 주장한 것 같이 껍질뿐인 예절을 버리라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한홍 목사는 완전히 상상력을 발휘하여 글을 써 놓은 것이다. 그러니 이황선생과 관련한 그의 주장은 허구에 기초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홍목사가 말한 “유교 500년 역사의 지나친 예법 강조로 인해 참된 인간성이 말살되고 메마른 권위주의와 이에 대한 하급층의 반발만 커져가는 것을 개탄하여, 이황선생은 껍질뿐인 예절은 버리고 참 인간을 만드는 학문을 깊게 하라는 준엄한 충고를 남긴 것이다”에서 500년은 누가 생각한 500년인가 궁금해진다.
이황선생이 충고를 남기기 위하여 뜻을 가다듬을 때에 지나간 500년을 생각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한홍목사가 생각해 보니 유교의 역사가 500년이란 말인가? 그 누가 생각한 500년인가?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현판의 글씨를 제멋대로 해석해 놓은 한홍목사는 다시 한걸음을 더 건너 뛴다. 자기가 해석한 내용을 가지고 이제는 이황선생이 아주 ‘가르쳤다고 한다’며 자기의 주장에 무게를 실어준다.
(22) <까다로운 매너와 화법을 따지는 영국의 젠틀맨십과 유사한 군자의 도를 한국형 리더십은 강조했다. 실속있는 내용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바른 모양새를 갖추는 것이었다. 이런 현실을 한탄한 퇴계 이황 선생은 쓸데 없는 예절 형식은 최소화하고 실제적인 학문의 깊이를 넓히라고 가르쳤다고 한다.>(거인 143)

어떤가? 과연 이황선생이 한목사가 말하는 것처럼 예절 형식은 최소한도로 하라고 가르쳤을까?
이황선생은 전혀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다. 이 대목은 한목사가 너무 많은 글을 쓰느라 너무 피곤한 나머지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피곤해 졸다가 꿈속에서 퇴계 이황선생을 만난 것이리라.
그렇다면 한홍목사가 현판의 단 두자에서 새롭게 끌어낸 이황선생의 사상은 어떻게 끝을 맺고 있는가 살펴보자. 다음 글을 읽어보자.

(23) <문제의 뿌리를 더듬어 보면, 이 권위에 대한 도전은 잘못된 권위주의에 상처입은 사람들의 쌓인 한의 폭발이다. 예절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아랫사람들에게 사랑은 주지 않고 군기만 잡으려 한 까닭에 힘이 두려워 머리 숙이는 것 뿐인데, 그것을 진심어린 존경으로 착각한다는 웃어른들, 그래서 기회만 오면 밑의 사람들은 쌓인 한을 엄청난 기세로 폭발시켜 왔다. 홍경래의 난, 동학혁명들은 다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가 있다. 오죽하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까지 나왔을까? 바로 퇴계 이황이 우려했던 유교의 허점이 야기한 극단적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거인, 107)

과연 홍경래의 난과 동학혁명이 한홍목사의 주장대로 그렇게 이해가 되는 사건이었던가?
동학란과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원인을 간단하게 ‘기회만 오면 밑의 사람들은 쌓인 한을 엄청난 기세로 폭발시켜 왔’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거기에 또한 이황선생도 모르는 이황 선생의 ‘우려’까지 곁들이고 있으니 정말 우려되는 글쓰기 아닌가?

어쨌든 한목사에 의하면 이제 이황은 ‘유교의 허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학자가 되어 훗날 실학파에게 ‘멘토’가 되며 동시에 실학의 선두주자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사실을 현판 단 두 글자에서 추출해 내어 한국사 연구에 있어서의 획기적인 진전을 보이게 한 한홍목사의 쾌거는 이뿐만이 아니다. 한홍목사가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이루어 놓은 학문적 쾌거는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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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 316 | 2006/08/10 22:24 | 영적 리더십은 없다 | 트랙백 | 덧글(0)

옥석혼효(玉石混淆)이니 옥석구분(玉石區分)해야

사람에게 영적 리더십은 없다. (7)
옥석혼효(玉石混淆)에서 옥석구분(玉石俱焚))으로 (1)

1) 옥석혼효(玉石混淆)이니 옥석구분(玉石區分)해야

나는 지금 ‘독자’ 노릇을 한창 하고 있다. 그 동안 읽지 못했던 책들을 옆에 쌓아두고 독서의 기쁨에 빠져있는데 그 기쁨의 대상이 되는 책중에 리더십 관련 책들도 빠지지 않는다. 워낙 리더십에 대한 책들이 많은지라 아직 전부 읽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읽은 책들에 대한 소회는 세가지이다. 책값은 저자의 지명도에 비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우선 들었다. 유명한 분이 쓴 책들은 하드 카버에다가 책값도 다른 책에 비해 비싸다. 이제 이름이 알릴만큼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책을 사보려 할 것이니 책값을 올려도 된다는 것인가? 그것은 그 동안 책을 열심히 사서 읽어주며 저자의 이름을 알려준 독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두번째는 ‘옥석혼효’(玉石混淆 )라는 사자성어가 떠올랐다. 옥과 돌이 한꺼번에 섞여 있어 구분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옥석구분’(玉石俱焚 ).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함께 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리더십 관련 책들에 대하여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옥과 돌이 섞여있는 이 리더십 도서계에서 어떤 것이 옥이고 어느 것이 돌인지를 골라내고자 하는 생각이다. 그래야만 옥석이 구분(俱焚)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읽은 책은 한홍 목사의 책들이다. 거의 다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아직 그의 책 모두를 읽지는 못했다. 거의 다 읽었다면서 아직 다 읽지 못했다는 말은 아직도 그가 계속해서 글을 쓰고 또 그 글들은 책으로 엮여져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나의 글 읽기가 그의 글 쓰기보다 속도가 느린가 보다. 그의 글쓰기는 언제 끝날지?

가장 먼저 읽은 책은 <거인들의 발자국>(이하 ‘거인’)이다. 거인들이 나오는 책이라 그런지 두께가 만만치 않다. 개정되기 전의 책은 368페이지이더니 개정되어 나온 책은 405페이지로 두꺼워졌다. 값도 만만치 않다, 13,000원. 하드카바라 더 비싼가? 과연 책값 외에 무엇이 그리 바뀌었을까?

어쨌든 나는 서론을 읽으면서 감격했다. 아, 드디어 영적 리더십에 대해 올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났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서문에서 그는 구구절절이 옳은 말을 한다. 리더십에 대한 그의 열정과 또한 리더십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는지를 그는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말하고 있다. 먼저 이런 말을 들어보자.

<그러나 한가지 우려되는 것은 ‘탁월한 리더가 되려면 이렇게 해 ‘라는 인스턴트식 방법론의 리더십 논리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데 대안들을 너무 턱턱 마구잡이로 내던지는 것 같아 걱정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리더십에 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몇 가지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들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거인, 19)

정말 그렇다. 시중에 나와있는 리더십 책을 읽어보면 얼마나 단정적인 말들을 그야말로 턱턱 마구잡이로 내던지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그 책 한권만 읽으면 사람이 다 모이는 리더가 되는 것 같은 착각을 가지게 하는 책 광고 카피에 그만 넘어가기도 하고, 이 책이야말로 리더십의 고전이요 법칙이라고 선전을 하니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서점에서 그런 책들을 집어드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베스트셀러라 하면 읽어야 어디에 가서도 말을 거들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에 그만 책을 집어 들게 된다. 그러나 그런 광고를 보게 되면 정말 살얼음판을 딛는 심정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의를 해야 한다. 언제 깨진 얼음 속으로 빨려들어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만큼 잘못된 책의 폐해는 크다. 그런 뜻에서 한홍 목사의 말은 어쩌면 내 생각과 그리 같은지, 나는 허겁지겁 물 만난 물고기처럼 다음을 읽었다.

<예를 들어,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회장 같은 한명의 탁월한 경영자가 나오면 그 사람의 리더십 방법들을 모두가 벤치마킹하려고 한다. 물론 그가 탁월한 사업가임은 틀림없지만, 이런 맹목적인 우상숭배에 가까운 인물 카피는 위험부담이 크다. 왜 그런가?>(거인, 19)

아, 내가 지금까지 했던 말이 여기에 고스란히 나와 있다. 지금까지 써 온 나의 글 요지가 그것이 아니었던가?
강준만 목사가 요셉의 특성을, 장점을 무려 수십가지를 뽑아내어 보여주었다고 그것은 하나님을 가리는 일이라고 내가 걱정한 것과 같은 걱정을 한홍 목사가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먹구름 낀 하늘에서 한줄기 빛을 본듯, 나의 동지 한명을 만났다고 좋아했다.
그는 그렇게 사람의 리더십 방법을 카피하는 것이 우상숭배라고 말하며 그게 위험부담이 크다고 하며 그 이유를 세가지로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계속 바뀌기 때문이다. 둘째, 장소와 문화가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세번째 이유는 분야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

첫번째와 두번째에 대한 그의 설명은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세번째 항목에 대한 설명은 인용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 설명이 리더십에 대한 이해를 더 잘하도록 도와주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길지만 그 세부 내용을 다 인용해 보기로 한다.

<셋째, 분야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비즈니스 세계의 리더십 방법론을 정치나 예술, 교육, 특히 교회에 그대로 적용하면 문제가 많이 생긴다. 물론 근본적인 개념, 가령 다음 세대 지도자를 키워내는 시스템 같은 본질의 문제는 분야를 초월해서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만, 그래도 각 분야의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어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맞게 빠르고 정확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첨단산업 경영 방식을, 장기적인 안목을 가져야 하는 교육정책에 바로 투입해서는 안된다. (한국의 교육개혁이 계속 난항을 거듭하는 이유는 정부와 교육이 너무 밀착되어 있어, 장관 한번 바뀔 때마다 입시정책이 정신 못 차리게 바뀌기 때문이다) 교회는 더더욱 그렇다. 비즈니스는 사장이 밥그릇을 쥐고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최소한의 권위가 있지만, 자원봉사를 철칙으로 하는 교회에서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접근하는 리더십은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물론 비즈니스 경영에서 많은 중요한 리더십 기본원리들을 배울 수 있긴 하지만, 그것을 깊이 숙고해서 여과하지 않고 그대로 교회에 적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목회자들 또한 단순한 종교적 흑백논리의 시각으로 급변하는 세상의 기업과 정부와 언론을 쉽게 평가해서는 안된다. >(거인, 20-21)

그래서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일반 리더십 이론이 영적 리더십에 무분별하게 도입되어 쓰여지는 이 현상에 대하여 내가 그렇게 안타까워했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던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홍 목사도 분명히 양쪽은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르다고 하지 않는가?
교회는 더더욱 그렇다, 는 말에 나는 감격했다. 아무렴 그렇고 말고….

어디 그뿐인가 한홍목사는 계속해서 나의 누선을 자극하는 말을 하고 있다.
<보통, 우리는 한명의 탁월한 리더를 부각시키고 그 사람의 천재성을 철저히 해부해서 공부하는 ‘위인전 읽기’식의 접근을 한다.> (거인, 21)

얼마나 딱 부러지는 말인가? ‘위인전 읽기’식의 리더십 이론은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다.
또 읽어보자. 그 다음에는 이런 말도 한다.
<삶에는 변수가 너무 많다. 문화, 시대, 특히 따르는 사람들의 반응 등 내가 어떻게 하지 못하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딸린 요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리더십은 이렇게 하면 된다는 칼 같은 결론을 성급히 내리는 것은 좀 자제할 필요가 있다.> (거인, 24)

일반 리더십이론에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나타날 여지가 없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사 모든 일에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인정해야 하고 따라서 리더십에 있어서도 역사를 변화시킨 리더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해야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비단 한홍목사가 서문에서만 옳은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 본문에서도 옳은 말을 많이 한다.
<리더십이라는 주제를 염두에 두고 성경을 읽어가는 중에 나는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예수님은 ‘리더십’에 대하여 언급한 적은 거의 없지만, 따르는 일(followership)에 대하여는 무수히 많은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다.> (거인, 63)

이말은 그가 리더십의 준거를 찾기 위해 성경을 읽었다는 것인데, 그렇게 찾아도 예수님이 리더십에 대하여 말씀하신 부분을 ‘거의’ 발견하지 못했다는 고백이다. 여기서 ‘거의’라는 말은 전무했다는 말과 동일한 말이다. 예수님께서 리더십에 대하여 한 말씀이라도 하셨다면 얼마나 자랑스럽게 그 말을 내 보였을 것인가? 그것이 바로 리더십의 준거가 될 것이니 말이다.

어쨌던 그의 다른 말을 계속 들어보자.
< 내가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실력과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면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나의 영향력을 받는 것이다.> (거인, 254)

맞다. 리더십을 영향력이라 정의하고 그 영향력을 남에게 행사하기 위하여 이것 저것을 하라고 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내가 실력과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면 다른 사람들이 저절로 나의 영향력을 받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는 리더십은 다르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해 버리는 그 무엇인가의 힘에 의해 이끌려간다.> (거인, 334)

그렇게 한홍목사는 리더십은 하나님이 세우는 리더십이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올바른 생각인가?
어디 그뿐인가, 한홍 목사는 리더십 각론 격으로 쓴 다른 책에서도 옳은 말을 하고 있다.

<리더십이란 결국 하나님이 이미 주신 축복의 열매를 따먹은 것이다. 성숙하지 못한 대부분의 리더는 “내가 무언가 이루었다”, “내가 역사의 한획을 그었다”,”무에서 유를 창조했다”하며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고 싶어한다. 그러나 성숙한 리더십은 다르다.> (리더여, 사자의 심장을 가져라. 이하 ‘사자’, 25)

그러니 전편 글에서 말한 바 존 맥스웰이 중국의 시를 인용하여 보여주는 훌륭한 지도자는 한홍목사의 견해에 의하면 성숙되지 못한 리더인 것이다.

그럼, 한목사가 리더십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의 결론은 무엇일까?
<리더십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모든 것을 갖추었으면서도 역시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겸허히 하나님 앞에 인정하는 자세일 것이다. > (거인, 365)
<당신이 아무리 스스로 아무리 탁월하다고 믿어도, 당신의 인격과 능력만 가지고는 안되는 일이 세상에 너무 많다. 좋은 사람들이 당신의 리더십을 따라주어야 하고, 또 적절한 역사의 바람이 맞아 떨어져야 한다. 그 모든 것을 뒤에서 지휘하시는 전능자 하나님의 도움없이는 그 어떤 리더십도 가능하지 않다. 이제 자기 힘으로 안간힘을 쓰며 살아보려 했던, 다른 사람을 내 마음대로 움직여 보려 했던 그 가련한 인간적 리더십의 과거에서 벗어나자.> (거인, 372-373)
<교회는 세상기업처럼 돌아가는게 아니다. 하나님의 일은 철저히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한다.> (남자는 인생으로 시를 쓴다. 이하 ‘인생으로 시를’. 129)

하나님의 일은 철저히 하나님의 방법대로, 라는 말에 나는 굵고 굵은 밑줄을 그었다.

이상이 내가 한홍목사의 글을 읽으면서 골라낸 옥(玉)이다. 이런 말들로 책을 한권 만든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리더십 책이 될 것이다. 한홍목사의 옥구슬 같은 이 말들로 재목을 삼아 리더십의 집을 지으면 그야말로 나무랄데 없는 훌륭한 집이 되어 나올 것이다. 아니, 재목이 훌륭하니 당연히 그러한 집이 되어 나와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을 품고 책을 읽어가는 나에게 한홍목사는 힘을 실어주는 말을 한다.
<어리숙한 것 같아도 하나님의 사람은 궁극적으로 진리의 옥석을 가려낸다.> (인생으로 시를, 213)

나는 한홍 목사의 이 말에 작은 소망을 가진다. 아무리 진리와 비진리가 함께 섞여있어 구분을 못할 지경이라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옥석이 분명 구분(區分)되리라는 것을 믿는다. 나의 이런 소망이 이 땅에서는 한낱 부질없는 것으로 끝날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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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 316 | 2006/08/10 22:20 | 영적 리더십은 없다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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