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8월 10일
돌 골라내기 (2) - 박약재에 새긴 뜻은?
사람에게 영적 리더십은 없다. (9)
옥석혼요(玉石混淆)에서 옥석구분(玉石俱焚))으로 (3)
3) 돌 골라내기 (2)
지난번 글에서 나는 한목사가 한자를 틀리게 썼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반백(斑白 - 半白) 그리고 성(成 - 城)이라는 한자가 잘못되었다고 지적을 하였지만 미안한 일이다. 그 이유는 첫번째, 요즈음에 한자를 모르는 것이 그리 흠이 될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어문정책이 오락가락했기에 입학을 언제 했느냐에 따라 한자세대와 한글세대로 나뉘니 한자를 틀리게 적었다고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니다. 둘째로는, 더구나 한목사는 미국에서 공부한 분이 아닌가. 또 하나 한목사가 원고에는 바른 한자를 적어주었는데 출판과정에서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만약 마지막 이유였다면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시기를 바란다.
다음의 경우도 출판사의 실수이기를 바란다.
(17) <대통령이 되는 것을 대권 (大勧)….> (시간의 마스터, 163)
(18) <성공하기 위해 유명한 사람들과 연(聯)을 맺으려고 …..> (시간, 252)
그런 실수가 있는데도 한홍목사는 한자를 자주 사용한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가 흔히 쓰지 않는 단어를 만들어 보이기도 한다. 대능(大能), 대심(大心)이라는 말이 그가 만들어 낸 단어이다.
(19) <사랑하는 이 땅의 리더들이여, 진정 대권(大權)을 추구하기 전에 대능(大能)을 구할 일이다.> ( 칼, 173)
(20) < 대권(大權)을 구하기 전에 대능(大能)을 구해야 하며, 대능을 구하기 전에 대심(大心)을 가져야 함을 알지 못했던 자의 비극이다.> (인생으로, 219)
대능이라 함은 능력을 많이 구하라, 큰 능력을 가지기를 소원하라는 뜻이리라. 하지만 대심이라는 단어는 우리 상식에 넓은 마음, 큰 마음인 줄로 아는데 앞의 문맥으로 보아 왜 이 말을 썼는지 알 수 없는 말이다. 어쨌든, 앞의 대권 혹은 대능이란 말과 운율을 맞추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대(大)자를 쓰면 더 좋게 보여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어색한 말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한목사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항상 큰 자리를 원하고 큰일을 하고 싶어하며 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대통령이 되는 것을 대권(大勧), 고등학교 다음엔 대학교(大學校), 나라 이름도 한국에 만족하지 못하고 대한민국 (大韓民國) 등 툭하면 대(大)자를 붙이는 것도 다 이런 욕구에서 비롯한다” (시간, 163)는 충고는 본인 스스로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이번에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한자를 잘못 쓴 것이 아니고 한자의 해석이다. 따라서 이 건은 위의 세가지 이유에서 모두 비껴난 일이니 나로서는 조금 덜 미안한 일이다. 솔직히 말해서 한문 해석이 틀렸다고 지적하기는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한목사의 잘못된 해석으로 해서 그 파장이 만만치 않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이 일에는 우리가 존경하는 퇴계 이황 선생까지 관련이 되어 있다. 이황선생은 전혀 모르는 일이고 관련이 없는데 그만 한목사의 잘못된 해석으로 그분의 생각까지 그릇되게 전달되고 있으니 후손으로서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그분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는 것도 후손으로서의 올바른 도리가 아닌가? 한자를 다르게 해석하는 바람에 이황선생만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역사 두 토막이 왜곡된 것이 있으니 그것도 바로잡을 일이다.
일단, 한홍목사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
(21) <안동의 퇴계 이황의 사가에 가보면 “박약(博約)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박사’ 할 때 쓰는 넓을 박(博)자와, ‘절약’ 할 때 쓰는 묶을 약(約)자, 즉 학문은 넓히고 예절은 줄이라는 뜻이다. 유교 500년 역사의 지나친 예법 강조로 인해 참된 인간성이 말살되고 메마른 권위주의와 이에 대한 하급층의 반발만 커져가는 것을 개탄하여, 이황선생은 껍질뿐인 예절은 버리고 참 인간을 만드는 학문을 깊게 하라는 준엄한 충고를 남긴 것이다.>(거인, 106-107)
한홍목사는 이황선생의 사가에 걸린 “박약재”라는 현판의 글씨를 해석하여 이황의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한홍목사로 하여금 이황선생의 사상을 풀어나가도록 한 이황선생의 사가에 걸린 현판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
먼저 사가(私家)라는 말을 살펴보자. 사가는 개인 집이라는 말이다. 개인이 살림집으로 쓰는 집을 사가라 한다.
이황선생의 사가는 어디일까? 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계동에 도산서원(陶山書院)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이 도산서원이 조선 중기의 대학자 퇴계 이황 선생이 머물며 후학들을 가르치던 곳인데 퇴계 선생은 1557년부터 이곳에 머물며 10년간 후학을 양성했다. 이황선생이 머무르며 사셨던 곳이니 그곳을 사가라 불러도 큰 문제는 없겠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사가는 아니다.
이황 선생 생존 당시, 도산서원에는 후학을 가르치던 도산서당과 자신의 공부방인 농운정사 밖에 없었으나, 선조 7년(1574년) 유림에서 퇴계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사당을 짓고, 전교당과 동재와 서재를 지었는데 바로 그 동재가 박약재이다. 혹시 수중에 천원권 지폐가 있다면 꺼내보시기 바란다. 천원권 지폐 앞면에는 이황 선생이, 그리고 뒷면에는 도산서당의 모습이 보인다. 뒷면에서 맨 앞에 크게 보이는 건물이 도산서당이고 그 뒤 나무에 가려 몸체는 보이지 않고 지붕만 보이는 건물을 지나 그 뒤로 건물 몸체부분 약간과 지붕이 보이는 건물이 바로 동재인 박약재이다. 그 위로 태극문양이 있는 대문이 보이는데 그것은 삼문이다. 그러니 지폐 뒷면의 그림중에서 가장 오른 쪽에 보이는 것이 삼문이고 오른쪽에서 두번째로 보이는 것이 바로 박약재이다.
따라서 그림 중 도산서당은 이황선생 생전에 있던 건물이지만 그 위로 보이는 건물 모두는 박약재를 포함하여 이황선생은 전혀 알지 못하는 건물들이다.
동재 곧 박약재가 사후에 지어졌으니 따라서 이황선생은 생전에 박약재라는 현판을 본 적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 이황선생이 현판에다가 뜻을 담아 준엄한 충고를 하였다는 것은 괴기영화에나 나옴직한 해석이다. 어느 여름날 제자들의 꿈속에 나타나신 이황선생이 “내 뜻은 박약(博約)이니 그것을 현판에 새겨라” 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이번에도 다시 백보를 양보하여 그의 제자들이 이황선생의 뜻을 알아 새겨서 ‘박약’이라고 현판에 새겼다고 하자.
그러면 박약이란 뜻이 한홍 목사가 해석한 내용과 같이 ‘학문은 넓히고 예절은 줄이라’는 것일까?
그럴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박약의 뜻은 한홍 목사의 해석대로가 아니다.
다시 한번 한목사의 글을 살펴보자.
< ‘박사’ 할 때 쓰는 넓을 박(博)자와, ‘절약’ 할 때 쓰는 묶을 약(約)자, 즉 학문은 넓히고 예절은 줄이라는 뜻이다.>
어떻게 박자와 약자 단 두자를 가지고 학문 그리고 예절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박약은 박문약례(博文約禮)의 준말이다. 그러니 박(博)자와 약(約)자 뒤에 각각 문(文)과 예(禮)를 넣어 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문(文)을 박(博)하게 하고 예(禮)를 약(約)해야 한다, 고 해석을 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한목사도 제대로 하고 있다.
한목사는 그래서 박학, 즉 학문을 박(넓게)하게 하라는 말을 “학문을 넓히고”라고 해석하여 맞게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다음 말 예(예절)를 約(묶다)하라는 말은 ‘묶다’라는 말 대신에 ‘줄이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니 눈 깜짝 할 사이에 ‘예로 묶어내라’는 말이 ‘예절은 줄이라’고 바꿔진 것이다. 한문장 안에서 앞의 말이 뒤에 가서 순식간에 바꿔진 것이다. 그러니 읽는 우리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눈감으면 코 베어가는 세상이다.
박문약례는 문은 넓게 하고 예를 묶으라는 뜻이다, 즉 '널리 공부하여 예의로 묶어내라'는 뜻이다.
그러니 한홍목사는 박자와 약자의 뜻을 알고 있어 약(約)자의 뜻은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주더니 정작 해석할 때에는 자의로 말을 바꿔버린 것이다.
좀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박문약례는 학문 연구와 도덕적 실천 방법을 말한 것으로 ‘넓게 배우고 예(禮)에 맞추어 행하라’는 뜻이다. 이말은 논어(論語)의 <"군자가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그것을 묶어 실천한다면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君子 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 )>라는 구절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기서 <박학어문(博學於文)>은 문헌을 통하여 널리 배우고 익힌다는 뜻이며, <약지이례(約之以禮)>는 이미 익힌 것을 다시 예로써 집약한다는 뜻이다.
결론하여, 이황선생은 그 현판과 전혀 관련이 없으며 또한 현판의 의미조차 한홍목사가 주장한 것 같이 껍질뿐인 예절을 버리라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한홍 목사는 완전히 상상력을 발휘하여 글을 써 놓은 것이다. 그러니 이황선생과 관련한 그의 주장은 허구에 기초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홍목사가 말한 “유교 500년 역사의 지나친 예법 강조로 인해 참된 인간성이 말살되고 메마른 권위주의와 이에 대한 하급층의 반발만 커져가는 것을 개탄하여, 이황선생은 껍질뿐인 예절은 버리고 참 인간을 만드는 학문을 깊게 하라는 준엄한 충고를 남긴 것이다”에서 500년은 누가 생각한 500년인가 궁금해진다.
이황선생이 충고를 남기기 위하여 뜻을 가다듬을 때에 지나간 500년을 생각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한홍목사가 생각해 보니 유교의 역사가 500년이란 말인가? 그 누가 생각한 500년인가?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현판의 글씨를 제멋대로 해석해 놓은 한홍목사는 다시 한걸음을 더 건너 뛴다. 자기가 해석한 내용을 가지고 이제는 이황선생이 아주 ‘가르쳤다고 한다’며 자기의 주장에 무게를 실어준다.
(22) <까다로운 매너와 화법을 따지는 영국의 젠틀맨십과 유사한 군자의 도를 한국형 리더십은 강조했다. 실속있는 내용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바른 모양새를 갖추는 것이었다. 이런 현실을 한탄한 퇴계 이황 선생은 쓸데 없는 예절 형식은 최소화하고 실제적인 학문의 깊이를 넓히라고 가르쳤다고 한다.>(거인 143)
어떤가? 과연 이황선생이 한목사가 말하는 것처럼 예절 형식은 최소한도로 하라고 가르쳤을까?
이황선생은 전혀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다. 이 대목은 한목사가 너무 많은 글을 쓰느라 너무 피곤한 나머지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피곤해 졸다가 꿈속에서 퇴계 이황선생을 만난 것이리라.
그렇다면 한홍목사가 현판의 단 두자에서 새롭게 끌어낸 이황선생의 사상은 어떻게 끝을 맺고 있는가 살펴보자. 다음 글을 읽어보자.
(23) <문제의 뿌리를 더듬어 보면, 이 권위에 대한 도전은 잘못된 권위주의에 상처입은 사람들의 쌓인 한의 폭발이다. 예절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아랫사람들에게 사랑은 주지 않고 군기만 잡으려 한 까닭에 힘이 두려워 머리 숙이는 것 뿐인데, 그것을 진심어린 존경으로 착각한다는 웃어른들, 그래서 기회만 오면 밑의 사람들은 쌓인 한을 엄청난 기세로 폭발시켜 왔다. 홍경래의 난, 동학혁명들은 다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가 있다. 오죽하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까지 나왔을까? 바로 퇴계 이황이 우려했던 유교의 허점이 야기한 극단적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거인, 107)
과연 홍경래의 난과 동학혁명이 한홍목사의 주장대로 그렇게 이해가 되는 사건이었던가?
동학란과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원인을 간단하게 ‘기회만 오면 밑의 사람들은 쌓인 한을 엄청난 기세로 폭발시켜 왔’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거기에 또한 이황선생도 모르는 이황 선생의 ‘우려’까지 곁들이고 있으니 정말 우려되는 글쓰기 아닌가?
어쨌든 한목사에 의하면 이제 이황은 ‘유교의 허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학자가 되어 훗날 실학파에게 ‘멘토’가 되며 동시에 실학의 선두주자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사실을 현판 단 두 글자에서 추출해 내어 한국사 연구에 있어서의 획기적인 진전을 보이게 한 한홍목사의 쾌거는 이뿐만이 아니다. 한홍목사가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이루어 놓은 학문적 쾌거는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계속된다.
옥석혼요(玉石混淆)에서 옥석구분(玉石俱焚))으로 (3)
3) 돌 골라내기 (2)
지난번 글에서 나는 한목사가 한자를 틀리게 썼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반백(斑白 - 半白) 그리고 성(成 - 城)이라는 한자가 잘못되었다고 지적을 하였지만 미안한 일이다. 그 이유는 첫번째, 요즈음에 한자를 모르는 것이 그리 흠이 될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어문정책이 오락가락했기에 입학을 언제 했느냐에 따라 한자세대와 한글세대로 나뉘니 한자를 틀리게 적었다고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니다. 둘째로는, 더구나 한목사는 미국에서 공부한 분이 아닌가. 또 하나 한목사가 원고에는 바른 한자를 적어주었는데 출판과정에서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만약 마지막 이유였다면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시기를 바란다.
다음의 경우도 출판사의 실수이기를 바란다.
(17) <대통령이 되는 것을 대권 (大勧)….> (시간의 마스터, 163)
(18) <성공하기 위해 유명한 사람들과 연(聯)을 맺으려고 …..> (시간, 252)
그런 실수가 있는데도 한홍목사는 한자를 자주 사용한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가 흔히 쓰지 않는 단어를 만들어 보이기도 한다. 대능(大能), 대심(大心)이라는 말이 그가 만들어 낸 단어이다.
(19) <사랑하는 이 땅의 리더들이여, 진정 대권(大權)을 추구하기 전에 대능(大能)을 구할 일이다.> ( 칼, 173)
(20) < 대권(大權)을 구하기 전에 대능(大能)을 구해야 하며, 대능을 구하기 전에 대심(大心)을 가져야 함을 알지 못했던 자의 비극이다.> (인생으로, 219)
대능이라 함은 능력을 많이 구하라, 큰 능력을 가지기를 소원하라는 뜻이리라. 하지만 대심이라는 단어는 우리 상식에 넓은 마음, 큰 마음인 줄로 아는데 앞의 문맥으로 보아 왜 이 말을 썼는지 알 수 없는 말이다. 어쨌든, 앞의 대권 혹은 대능이란 말과 운율을 맞추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대(大)자를 쓰면 더 좋게 보여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어색한 말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한목사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항상 큰 자리를 원하고 큰일을 하고 싶어하며 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대통령이 되는 것을 대권(大勧), 고등학교 다음엔 대학교(大學校), 나라 이름도 한국에 만족하지 못하고 대한민국 (大韓民國) 등 툭하면 대(大)자를 붙이는 것도 다 이런 욕구에서 비롯한다” (시간, 163)는 충고는 본인 스스로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이번에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한자를 잘못 쓴 것이 아니고 한자의 해석이다. 따라서 이 건은 위의 세가지 이유에서 모두 비껴난 일이니 나로서는 조금 덜 미안한 일이다. 솔직히 말해서 한문 해석이 틀렸다고 지적하기는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한목사의 잘못된 해석으로 해서 그 파장이 만만치 않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이 일에는 우리가 존경하는 퇴계 이황 선생까지 관련이 되어 있다. 이황선생은 전혀 모르는 일이고 관련이 없는데 그만 한목사의 잘못된 해석으로 그분의 생각까지 그릇되게 전달되고 있으니 후손으로서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다. 그러니 그분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는 것도 후손으로서의 올바른 도리가 아닌가? 한자를 다르게 해석하는 바람에 이황선생만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역사 두 토막이 왜곡된 것이 있으니 그것도 바로잡을 일이다.
일단, 한홍목사의 말을 들어보기로 하자.
(21) <안동의 퇴계 이황의 사가에 가보면 “박약(博約)재”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박사’ 할 때 쓰는 넓을 박(博)자와, ‘절약’ 할 때 쓰는 묶을 약(約)자, 즉 학문은 넓히고 예절은 줄이라는 뜻이다. 유교 500년 역사의 지나친 예법 강조로 인해 참된 인간성이 말살되고 메마른 권위주의와 이에 대한 하급층의 반발만 커져가는 것을 개탄하여, 이황선생은 껍질뿐인 예절은 버리고 참 인간을 만드는 학문을 깊게 하라는 준엄한 충고를 남긴 것이다.>(거인, 106-107)
한홍목사는 이황선생의 사가에 걸린 “박약재”라는 현판의 글씨를 해석하여 이황의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한홍목사로 하여금 이황선생의 사상을 풀어나가도록 한 이황선생의 사가에 걸린 현판의 내용은 어떤 것일까?
먼저 사가(私家)라는 말을 살펴보자. 사가는 개인 집이라는 말이다. 개인이 살림집으로 쓰는 집을 사가라 한다.
이황선생의 사가는 어디일까? 경북 안동시 도산면 도계동에 도산서원(陶山書院)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이 도산서원이 조선 중기의 대학자 퇴계 이황 선생이 머물며 후학들을 가르치던 곳인데 퇴계 선생은 1557년부터 이곳에 머물며 10년간 후학을 양성했다. 이황선생이 머무르며 사셨던 곳이니 그곳을 사가라 불러도 큰 문제는 없겠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사가는 아니다.
이황 선생 생존 당시, 도산서원에는 후학을 가르치던 도산서당과 자신의 공부방인 농운정사 밖에 없었으나, 선조 7년(1574년) 유림에서 퇴계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사당을 짓고, 전교당과 동재와 서재를 지었는데 바로 그 동재가 박약재이다. 혹시 수중에 천원권 지폐가 있다면 꺼내보시기 바란다. 천원권 지폐 앞면에는 이황 선생이, 그리고 뒷면에는 도산서당의 모습이 보인다. 뒷면에서 맨 앞에 크게 보이는 건물이 도산서당이고 그 뒤 나무에 가려 몸체는 보이지 않고 지붕만 보이는 건물을 지나 그 뒤로 건물 몸체부분 약간과 지붕이 보이는 건물이 바로 동재인 박약재이다. 그 위로 태극문양이 있는 대문이 보이는데 그것은 삼문이다. 그러니 지폐 뒷면의 그림중에서 가장 오른 쪽에 보이는 것이 삼문이고 오른쪽에서 두번째로 보이는 것이 바로 박약재이다.
따라서 그림 중 도산서당은 이황선생 생전에 있던 건물이지만 그 위로 보이는 건물 모두는 박약재를 포함하여 이황선생은 전혀 알지 못하는 건물들이다.
동재 곧 박약재가 사후에 지어졌으니 따라서 이황선생은 생전에 박약재라는 현판을 본 적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거기에 이황선생이 현판에다가 뜻을 담아 준엄한 충고를 하였다는 것은 괴기영화에나 나옴직한 해석이다. 어느 여름날 제자들의 꿈속에 나타나신 이황선생이 “내 뜻은 박약(博約)이니 그것을 현판에 새겨라” 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이번에도 다시 백보를 양보하여 그의 제자들이 이황선생의 뜻을 알아 새겨서 ‘박약’이라고 현판에 새겼다고 하자.
그러면 박약이란 뜻이 한홍 목사가 해석한 내용과 같이 ‘학문은 넓히고 예절은 줄이라’는 것일까?
그럴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박약의 뜻은 한홍 목사의 해석대로가 아니다.
다시 한번 한목사의 글을 살펴보자.
< ‘박사’ 할 때 쓰는 넓을 박(博)자와, ‘절약’ 할 때 쓰는 묶을 약(約)자, 즉 학문은 넓히고 예절은 줄이라는 뜻이다.>
어떻게 박자와 약자 단 두자를 가지고 학문 그리고 예절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박약은 박문약례(博文約禮)의 준말이다. 그러니 박(博)자와 약(約)자 뒤에 각각 문(文)과 예(禮)를 넣어 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문(文)을 박(博)하게 하고 예(禮)를 약(約)해야 한다, 고 해석을 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한목사도 제대로 하고 있다.
한목사는 그래서 박학, 즉 학문을 박(넓게)하게 하라는 말을 “학문을 넓히고”라고 해석하여 맞게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다음 말 예(예절)를 約(묶다)하라는 말은 ‘묶다’라는 말 대신에 ‘줄이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니 눈 깜짝 할 사이에 ‘예로 묶어내라’는 말이 ‘예절은 줄이라’고 바꿔진 것이다. 한문장 안에서 앞의 말이 뒤에 가서 순식간에 바꿔진 것이다. 그러니 읽는 우리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눈감으면 코 베어가는 세상이다.
박문약례는 문은 넓게 하고 예를 묶으라는 뜻이다, 즉 '널리 공부하여 예의로 묶어내라'는 뜻이다.
그러니 한홍목사는 박자와 약자의 뜻을 알고 있어 약(約)자의 뜻은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주더니 정작 해석할 때에는 자의로 말을 바꿔버린 것이다.
좀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박문약례는 학문 연구와 도덕적 실천 방법을 말한 것으로 ‘넓게 배우고 예(禮)에 맞추어 행하라’는 뜻이다. 이말은 논어(論語)의 <"군자가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그것을 묶어 실천한다면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君子 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 )>라는 구절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기서 <박학어문(博學於文)>은 문헌을 통하여 널리 배우고 익힌다는 뜻이며, <약지이례(約之以禮)>는 이미 익힌 것을 다시 예로써 집약한다는 뜻이다.
결론하여, 이황선생은 그 현판과 전혀 관련이 없으며 또한 현판의 의미조차 한홍목사가 주장한 것 같이 껍질뿐인 예절을 버리라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한홍 목사는 완전히 상상력을 발휘하여 글을 써 놓은 것이다. 그러니 이황선생과 관련한 그의 주장은 허구에 기초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홍목사가 말한 “유교 500년 역사의 지나친 예법 강조로 인해 참된 인간성이 말살되고 메마른 권위주의와 이에 대한 하급층의 반발만 커져가는 것을 개탄하여, 이황선생은 껍질뿐인 예절은 버리고 참 인간을 만드는 학문을 깊게 하라는 준엄한 충고를 남긴 것이다”에서 500년은 누가 생각한 500년인가 궁금해진다.
이황선생이 충고를 남기기 위하여 뜻을 가다듬을 때에 지나간 500년을 생각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한홍목사가 생각해 보니 유교의 역사가 500년이란 말인가? 그 누가 생각한 500년인가?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현판의 글씨를 제멋대로 해석해 놓은 한홍목사는 다시 한걸음을 더 건너 뛴다. 자기가 해석한 내용을 가지고 이제는 이황선생이 아주 ‘가르쳤다고 한다’며 자기의 주장에 무게를 실어준다.
(22) <까다로운 매너와 화법을 따지는 영국의 젠틀맨십과 유사한 군자의 도를 한국형 리더십은 강조했다. 실속있는 내용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바른 모양새를 갖추는 것이었다. 이런 현실을 한탄한 퇴계 이황 선생은 쓸데 없는 예절 형식은 최소화하고 실제적인 학문의 깊이를 넓히라고 가르쳤다고 한다.>(거인 143)
어떤가? 과연 이황선생이 한목사가 말하는 것처럼 예절 형식은 최소한도로 하라고 가르쳤을까?
이황선생은 전혀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다. 이 대목은 한목사가 너무 많은 글을 쓰느라 너무 피곤한 나머지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피곤해 졸다가 꿈속에서 퇴계 이황선생을 만난 것이리라.
그렇다면 한홍목사가 현판의 단 두자에서 새롭게 끌어낸 이황선생의 사상은 어떻게 끝을 맺고 있는가 살펴보자. 다음 글을 읽어보자.
(23) <문제의 뿌리를 더듬어 보면, 이 권위에 대한 도전은 잘못된 권위주의에 상처입은 사람들의 쌓인 한의 폭발이다. 예절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아랫사람들에게 사랑은 주지 않고 군기만 잡으려 한 까닭에 힘이 두려워 머리 숙이는 것 뿐인데, 그것을 진심어린 존경으로 착각한다는 웃어른들, 그래서 기회만 오면 밑의 사람들은 쌓인 한을 엄청난 기세로 폭발시켜 왔다. 홍경래의 난, 동학혁명들은 다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가 있다. 오죽하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까지 나왔을까? 바로 퇴계 이황이 우려했던 유교의 허점이 야기한 극단적 상황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거인, 107)
과연 홍경래의 난과 동학혁명이 한홍목사의 주장대로 그렇게 이해가 되는 사건이었던가?
동학란과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원인을 간단하게 ‘기회만 오면 밑의 사람들은 쌓인 한을 엄청난 기세로 폭발시켜 왔’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거기에 또한 이황선생도 모르는 이황 선생의 ‘우려’까지 곁들이고 있으니 정말 우려되는 글쓰기 아닌가?
어쨌든 한목사에 의하면 이제 이황은 ‘유교의 허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학자가 되어 훗날 실학파에게 ‘멘토’가 되며 동시에 실학의 선두주자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사실을 현판 단 두 글자에서 추출해 내어 한국사 연구에 있어서의 획기적인 진전을 보이게 한 한홍목사의 쾌거는 이뿐만이 아니다. 한홍목사가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이루어 놓은 학문적 쾌거는 동서고금을 넘나들며 계속된다.
# by | 2006/08/10 22:24 | 영적 리더십은 없다 | 트랙백 | 덧글(0)



